최근 아는 몇 분들과 몇 차례 대화를 하면서 몇 번의 답답함을 느꼈다. 대화를 별로 많이 하지 않는 나로서는 충돌 또한 그리 많이 겪지 않는 편이고, 따라서 충돌을 극복할 방법도 별로 잘 알지 못한다.
오늘 이 문제들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이런 답답함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내 생각의 결론은 기본 가정부터 다른 것에서 출발하는 대화에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기본 가정이란 것은 사고에서의 패러다임 또는 프레임 문제다.
예를 들어 자녀교육에 대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줄 것이냐 억압적인 분위기를 줄 것이냐 하는 문제가 그 대표적이다. 이 자녀교육 문제는 최근이 아니라도 종종 겪는 패러다임의 문제였는데, 얼마전에는 민주당 지지자들과의 대화에서도 패러다임의 차이를 발견했다. 문제는 내가 주장하는 방법은 이상적인데다가 내가 미혼이라서 적용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토론에서 상대방은 할 말이 없어지면 꼭 이 점을 지적한다. (업적이 있어야만 상대의 생각을 인정해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큰 병패중 한 가지다.)
때로는 선택할 수 없는 차이도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꼭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디오나 캠립(Cam rip)으로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론 컴퓨터에서 볼 때만 고려해도 Bluray와 DVD로 보는 것에서 같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음악을 들을 때도 꼭 CD로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128k 음질의 mp3를 재생해도 충분하다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문제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음악은 그런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는데, 128k의 mp3가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192k 이상의 음질을 128k와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다.
소주의 문제도 비슷한 예이다. 제조사에 따른 소주의 맛은 60년대까지는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최근에는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소주는 순수한 물과 알콜(alcohol, 에탄올)로 이뤄졌고, 알콜이 생성될 때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메탄올은 이제는 완전히 제거된다. 똑같은 물질로 이뤄진 두 물질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주점에 가면 항상 들을 수 있는 말이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X◇로 주세요.”와 같은 이야기다.[footnote]물론 모든 소주의 맛이 같은 것은 아니다. 특별히 강원도에서 판매되는 소주의 경우는 분명히 느껴진다. – 기술력이 부족한 듯…[/footnote]
대화를 할 때 상대의 이야기를 자기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려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노력해야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이 측면에서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상명하복을 당연시하는 유교문화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상명하복만 하는 곳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내 생각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뿐이고, 서로간의 의견교류는 별로 필요하지 않는 능력이 된다.
이런 문제는 교육과 사회분위기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사회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다양한 시각에 입각한 사고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기가 쉽다. (다른 말로 창의력을 기르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다양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여 제대로 활동하는 것을 제약시킨다. 이러한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것으로 ‘군대’라는 곳의 ‘고문관’이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수업시간에 질문하지 않는 것….. (질문하면 야유를 보내는 분위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