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 아파트숲 사이의 공원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한 곳은 지붕 밑에 의자가 있는데 주변의 할아버지들 수십 명이 모이는 놀이터다.
할아버지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서 장기와 바둑을 두신다. 바둑보다는 장기를 훨씬 많이 두신다.
할아버지들의 장기를 구경하자면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직접 두지는 않고 훈수만 두시는 할아버지…..
자기가 나이도 많은데 훈수두는 걸 따라하지 않는다고 때리려는 할아버지…..
틀린 걸 훈수두시고서 끝가지 자기 의견이 옳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상대가 방심한 틈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장기알을 잡아버리시는 할아버지…
그 와중에 자신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으시는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여러 가지 이성에 의해 통제받던 행동들이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본연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한 쪽 끝에서 장기를 두시는 할아버지 두 분이 계셨는데 내가 책에서나 봤었던, 실전에서는 전혀 구경해본적도 없는 농포장기를 구사하고 계셨다. 이런 포진도 쓰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실제로 쓰시는 모습을 보니 정말 신기했다. 난 농포장기의 뒷수순이 너무 복잡해서 절대 사용하지 않는 포진이다. ^^
장기가 재미없는 것은 장기는 빅이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바둑의 경우 1년동안 두어지는 수백판의 프로바둑에서 비기는 판이 두세 판정도일 뿐이다. 비기는 것도 실력이 있어야 비길 수 있다. 일개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비길수도 없다. 빅이는 판은 3패 또는 4패의 경우에 가장 많고,그 이외의 아주 특수한 모양에서 가끔 비기는 경우가 있다. 그런 판이 하나 나오면 전세계적으로 떠들석해진다.
그러나 장기는 10판 두면 두세 판은 비길정도로 승부가 명료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런 모양이 나오면 서로 비기기로 하도록 정해졌다. 고수장기에서는 시간제한을 두고, 그 시간안에 못 끝내면 남은 장기알들을 점수화하여 승자를 결정한다. 점수는 늦게 시작하는 한(漢)에게 0.5점을 줘서 늦게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먼저 시작하는 초(楚)가 더 유리하다.)
이렇게 승부가 애매모호한 것은 체스(chess)도 비슷하다. 1997년 5월 11일에 있었던 IBM 슈퍼컴퓨터였던 ‘딥 블루’와 소련의 체스 챔피언이었던 카스파로프를 최종전에서 이겼을 때도 전적이 2승 3무 1패로 무승부가 많았다. 또 2006년 11월 25일부터 12월 5일까지 에 있었던 세계 체스 챔피언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크람니크가 체스 컴퓨터 ‘딥 프리츠’의 대결도 4무 2패의 전적으로 컴퓨터가 이겼는데, 여기서 주목할 내용도 6판중 4판을 비겼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장기는 사실 다른 게임보다 훨씬 간단한 편이다. 말의 수가 36개밖에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칸도 90칸밖에 되지 않는다. 바둑이 무제한 바둑알과 361개 눈이 있는 판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훨씬 간단해진다. 더군다나 기물이 움직일 수 있는 칸 수도 매우 적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크게 제한된다. 프로바둑기사들이 장기에서도 초고수가 쉽게 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말은 어느정도 맞는 것 같다. 체스는 내가 둘 줄 몰라서 잘 모르겠지만….. 또한 장기만큼 간단한 것 같다.
바둑의 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포석, 전투, 끝내기로 나눈다. 장기 또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포진, 전투, 알장기로 나눈다. 알장기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바둑의 경우 초반부인 포석이 게임의 다른 요소보다 제일 어렵다. 그만큼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나 체스의 경우 초반부의 포진보다 중반부 전투가 어려운 편인데, 처음 시작할 때 기물의 위치가 정해져 있어서 변화의 폭이 작기 때문이다. 경기 종반전이 비교적 간단해지는 것은 비슷하다. 바둑의 경우 둘 곳이 줄어들어서이고, 장기나 체스의 경우 움직일 수 있는 기물이 적기 때문이다.
장기의 경우 게임을 끝내기 위한 공식같은 것이 존재한다. 차삼릉, 대삼릉, 소삼릉이 그것이다. 수비측의 양 사가 살아남았다는 조건하에 승패여부는 다음과 같다.
차삼릉은 차를 포함한 세 기물을 뜻하는 말로, 차졸졸의 경우가 아니면 상대방이 양사를 갖고 있어도 무조건 이긴다고 한다. 대삼릉은 마포상중 세 조각이 남아있는 경우를 말하고, 포를 포함했을 경우 무조건 이긴다. 반면 소삼릉은 졸이나 병을 한 개 포함한 대삼릉을 말하며, 포를 포함하지 않을 경우 무조건 비긴다.
수비하는 측에서 1졸이 살아남고, 공격하는 측에서 1졸 1상이 살아남았을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는 수비하는 졸의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아무튼 빅이다. 수비하는 측에서 1차가 살아남고, 공격하는 측에서 1차 2졸이 살아남으면 어떨까? 이 경우는 공방의 시작부터 종료까지 50여수를 진행해야 끝나는만큼 고수가 아니면 수순을 진행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최종결과는 빅이다. (하지만 한 수만 실수해도 경기가 끝나는만큼 어려운 싸움이다.) 비슷하게 1차 2졸의 공격에 2사로도 방어가 가능하다.
반면 기물의 수로는 무승부가 되지만, 기물의 위치 때문에 승부가 갈리는 경우도 있다. 공격쪽에서는 2차가 살아남고, 수비측에서는 2사와 포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될까? (포와 졸이 아닌 다른 기물이어도 마찬가지다.) 세 기물로 장군을 부를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해버리면 차로서는 이길 도리가 없어진다. 하지만 그 전에 두 차로 장군을 불러 중앙의 궁 양쪽에 사를 묶어둔 상황이라면 어떨까? (다른 기물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재미있게도 이런 경우에는 확실하게 승부가 나게 된다. 수순은 20여수로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그러나 장기는 나름대로 복잡한 것 같지만, 하다보면 상당히 정형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바둑은 딱 한 판만 보게 됐다. 두 분이 호선으로 한 판을 두시던데… 대략적인 경과는..
초반에 백의 우상귀 처리가 좋지 않았던데다가 우하귀의 삼삼에 너무 빨리 뛰어든 관계로 백이 실리를 얻지 못한 채 큭 두터운 세력을 백에게 줬다. 집으로 치면 20집 가까운 차이…. 그래서 거의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변에서 완전히 엉뚱한 수를 서너차례 연속으로 흑이 두면서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 (그 당시에 전세가 역전됐다는 것을 두 분 다 모르셨을 것이다. 단지 처리가 어렵다고 생각하셨을듯..) 그리고 그 이후 소소한 손해를 흑이 계속 봐서 결국 백이 40집은 남는 형세가 됐다.

그러나 바둑판도 거의 다 채워지고, 더이상 승부가 결정될 곳이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백의 난조…..
결국 바둑은 끝내기에서 순식간에 차이가 좁혀져 반면으로 두 집차이….. 결국 덤까지 포함 8집반의 차이로 백이 이겼다.
맞수란 것은…. 이런 것이리라…. 한 순간은 누가 많이 앞서는 것 같아도, 결과는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것…..
그리고 그런 맞수가 있기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긴장을 풀 수 없어 인생은 즐거운 것~!
ps. 여기에서 만약 누군가가 반칙을 하여 승리를 거둔다면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