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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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4-02-25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보면 습관을 바꾸면 사람이 바뀐다고 한다. 하지만 습관은 바꾸기 정말 힘든것 같다. 더군다나 대를 이어 ‘후천적 유전‘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1. 부모님을 부르는 호칭의 습관
나는 부모님을 부를 때 ‘아버지’, ‘엄마’라고 어렸을 때부터 불렀다. 아마도 (지금도 그렇지만) 무서운 아버지는 (거부감이 강하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했던듯 하다. (항상 혼내는 편이고, 다정다감하거나 칭찬하는 소리를 못 들었다.) 반면 어머니는 언제나 다정다감하셨고, 모든 상담은 어머니를 통해서 할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내가 어렸을 적 지식의 거의 전부는 어머니께 배운 것이니 어찌 어머니를 엄마라 부르지 않겠는가?

어머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어머니’라 부르고자 맘먹은 것이 대학교 2학년 때(만 20살 때)였다. 처음에는 어머니라 부르자 크게 마음먹고, 신경쓰면서 말해도 엄마라 부르기 일수였던 것이 점차 어머니라는 단어도 자연스레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약 2년전 어머니가 우리의 곁을 떠나 하나님께 가실 때까지도 100% 자연스럽게 어머니라 부르지 못했다. (어머니가 가신지 2년이 다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어머니라 부르기 결심한지 꼭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어머니라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2. 메모하는 습관
최근 공부하면서 ‘메모’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내가 조금만 일찍, 그러니까 대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메모를 철저히 했더라면 지금의 나의 인생은 확 변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물리학자’라는 10년 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었고, 학과 성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메모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면 조금 더 심사숙고하여 공부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당시 잘못된 결정적 실수 몇 번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과거의 ‘만약’이란 가정은 필요없는 것이지만 정말 그 때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잘못된 선택으로 지금의 상황과 똑같은 위치까지 오게 됐더라도) 지금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제서야 메모의 중요성을 깨닫고, 메모를 생활화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플레너나 메모장 혹은 수첩을 사용해 봐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10년을 습관화 해야 진정한 나의 것이 될 것 같다. (어째튼 현재 최선을 다해서 메모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 독서하는 습관
독서는 나의 오랜 희망이자 친구이자 동료였다.

초등학교 때는 집에 책이 많은 아이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었다. 4학년 때 학교에 학급문고가 300여권 마련되면서 나의 독서욕은 어느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그때는 주로 동화와 과학책을 읽었다.) 그러나 중학교로 전학하면서 나의 독서욕은 다시금 벽에 부딪혔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학교에 읽을만한 책이 구비되지 않았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사실 중학교 때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 배운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만은 없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독서할 자유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나의 독서욕은 왕성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못 먹더라도 그 돈으로 하숙집 주변에 있는 서점을 뒤지며 책읽기를 시작했으니까….

이후 나의 독서욕은 군복무기간 이외에는 항상 작동하고 있었다. 읽는 양의 변화야 항상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

하지만 독서에도 습관이란 것이 존재하는데

1. 읽는 책의 결정
2. 읽는 속도
3. 읽는 방법
4. 읽는 시간과 자세

등등이 그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읽는 속도가 조금 빠른 편인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거의 모든 책을 과학책으로 독서하면서 천천히 정독하는 쪽으로 습관이 바뀌었다. 그 1년간 생긴 습관은 지금까지도 모든 책을 (심지어 시나 소설까지) 정독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건 대입 시험에서 국어문제를 풀 때 큰 손해로 나타나게 된다. 자꾸 지문이 늘어나지 않는가??)

4. 음악듣는 습관
음악은 기호다. 가장 대중적인 가요에서부터 American pop, 째즈, 클래식 등등….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편애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다. 물론 가끔 박학다식하여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요를 좋아하지만, 이상하게 가요를 듣지 않고 American pop만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아니라 클래식만 듣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째즈나 뉴웨이브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음악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의 경험에 많이 의존한다. 어떤 종류의 음악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은 당연히 그런 음악을 즐겨 듣지 않을뿐만 아니라 경우에 다라서는 그런 음악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듣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또한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듣다보면 그쪽으로 좋아지는 것이 음악이란 것이다.

내가 중3때 여름방학에 할 것이 정말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 책이나 공부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할 일이란 라디오를 듣는 것 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더군다나 우리 집이 시골이어서) 정말 라디오 듣는 것이 유일하게 시간때우는 방법이었다.

당시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바꾸다가 클래식이란 걸 알게 됐고, 여름방학 한 달동안 클래식이란 것에 푸욱 빠져서 살 수 있었다. 내가 클래식이란 것에 익숙해 진 건 이런 경험이 있고나서였다. 그 전에는 클래식과 결코 친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클래식은 싫어하면서도 영화나 드라마 OST에 나오는 클래식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사실 클래식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생소한 것이라 싫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즉 음악은 습관이다.


습관에 관한 짧은 시 하나를 보자. 평소 존경하는 류시화 시인님의 시다. 물론 이 시는 습관에 관련된 시는 아니고 사랑을 주제로 한 시이다. 하지만……

소금인형

– 시인 : 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이 시는 습관 바로 그 자체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일종의 습관과 같다[footnote]이 시 <소금인형>에서의 사랑의 대상은 꼭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사람 이외의 다른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도 대상이 될 수 있다.[/footnote]. 물론 습관과 다른 사랑도 있다.

당신이 음악들 듣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습관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쁜 습관들은 편이를 위해서 오랜 시간동안 행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좋은 습관보다 쉽게 고칠 수 없다. 더군다나 더 힘든 것은 내게 있는 습관이 좋은 습관인지 나쁜 습관인지 스스로는 지독히도 알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좋은 습관보다는 나쁜 습관을 더 쉽게 배우기 때문에 전파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습관은 “후천적 유전”이 되어 나쁜 습관일수록 더더욱 그러한 듯 하다. (선천적으로 유전되는 습관도 분명 있다.)

습관 – 나를 위해서, 나의 가족을 위해서 나의 2세를 위해서라도 하나씩 좋은 습관을 늘려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ps. 어떤 것은 10년을 똑같이 해도 습관이 되지 않는데, 어떤 것은 불과 몇시간만에 습관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참 신기할 따름이다.

[#M_특별부록 : 소금인형의 전설..|특별부록 : 소금인형의 전설..|특이한 재료로 만들어진 인형이 하나 있었다.

‘소금인형”….

이 인형은 여행하기를 무척 좋아해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바다에 다다르게 되었다.

난생처음 본 바다에 놀랐지만 친근감이들어 물었다.

“얘 너의 이름은 뭐니?”

“응.나의 이름은 바다야.”

“바다? 바다가 뭐야? 넌 도대체 누구니?”

바다가 대답했다.

“말로 나를 설명하기는 곤란해. 직접 네가 내안에 들어와 보면 알수있어.”

‘소금인형’은 살며시 왼쪽발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왼쪽발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소금인형’은 겁이 났지만 조금 더 들어와 보면 자신을 알수 있다는 바다의 말을 믿고 오른쪽 발도 집어넣었다.

그랬더니 오른쪽 발도 사라져 버렸다. 바다에 닿는 즉시 자신의 것이 없어져 버리는 ‘소금인형’은 그렇게 오른팔과 왼팔까지 바다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점점 자신의 몸이 사라질수록 ‘소금인형’은 바다를 조금씩 알수 있을것 같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주 작은 알갱이 하나로 남게 되었다. 그 작은 알갱이 하나마저 사라지려고 하는순간 ‘소금인형’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난 이제 바다야. 그래 이제 알겠어.네가 바로 나란 것을.”

사랑은 내가 그의 세계에 뛰어듦을 의미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감미로운 언어가 아니라 그의 눈물에. 그의 슬픔에 나의 몸을 담그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다.

세상 어떠한 힘겨움에도 결코 너를 놓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하여 마침내 너와 내가 아닌 아름다운”우리”가 되겠다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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