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2009.06.08 월요일) 조카 중에 한 명이 군대에 간다. 화학대 특기를 받고 논산으로 간다니 생활 자체가 어렵지는 않을듯하다. 가깝게 지내던 조카라서 옛날 입대하던 때가 더 생각나는 것같다.
입대하는 조카의 부모인 매형의 엑셀 승용차를 타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넷이서 아침일찍 춘천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춘천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
더 이상한 일은 차를 타고 가면서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엔 내 마음이 추워지나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 얼마나 추워졌는지 유리창에 성애가 잔뜩 끼어서 도저히 차를 운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우고 히터로 유리창을 데워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네 차는 원래 이렇게 추운가?”
우리 일행은 추위에 떨면서 춘천에 도착했다. 102보충대로 들어가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건너야 하는 춘천의 다리 바로 앞에 있는 음식점에 들려서 점심을 먹었다. 소집시간은 1시였던 것 같고, 우리가 춘천에 도착한 것은 11시 반(?)쯤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당시에 뭘 먹었는지 잘 모르겠다. 매운탕 비슷한 걸 시켰는데, 입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인기 때문에 음식에 신경을 안 쓰는 곳인지 맛이 정말 없었다. (어쩌면 내 마음이 음식맛을 느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식구들도 전반적으로 맛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102보충대에 도착하니 이미 차들이 정말 많이 주차되어 있었고, 우리 뒤로도 정말 많은 차들이 있었다. 우리는 연병장에 모이지 않고, 102보충대 뒷쪽 산에 만들어진 스탠드에 모였다. 어머니와 식구들은 저만치 앞 막사 사이까지 나를 배웅해 주시고 계셨다. 그 곳에서 군인들이 일행들과 헤어지라고 강제하고 있었고, 같이 갈 수 없게 된 어머니는 결국 눈을 붉히셨다. 지금도 어머니의 붉게 충혈되던 눈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 그 모습은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102보충대에서 생활한지 이틀이 지난 날 밤에 가수 김광석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누군가 복도를 뛰어가면서 “김광석이 자살했대…”를 외치고 지나갔다. 취침을 위해 막 누웠던 신병들은 웅성웅성거렸고, 처음에는 모두들 농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비로소 정확한 소식이었음을 알곤 ‘아! 내가 진짜 세상과 단절됐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세상과 단절된 시간 26개월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최대한 변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은근슬쩍 나는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고, 제대후 이전의 꿈과 목표를 향해 도전하기엔 너무나 궤도에서 이탈해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미련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진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겉보기에 목표를 이룬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 길은 내가 목표로 하는 길이 아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와 결국 인생의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됐다.
그때부터이던가? 여성의 인권신장이 어쩌구 저쩌구 지껄이면서도 막상 병역문제 등을 외면하고 출산 등 얼토당토않은 문제들과 엮는 페미니스트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서 배울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들의 주장은 표리부동한 것 뿐이지 않을까?) 그 이외에도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군대가기 전부터 특이한 성격과 특이한 생각을 많이 하던 나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더 특이한 정신세계에 살게 된 것 같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특이하지 않은 정신세계를 갖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조카가 입대한다니 옛날 생각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써봤다.
군 생활 잘 하고 제대해라.
남이 강제한 길이건 스스로 선택한 길이건 인생에서 남는 건 본인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뿐이더라…
ps.
매형의 엑셀 승용차가 추웠던 것은 히터와 속도게이지 연결단자를 거꾸로 연결해놓아 속도가 빨라지면 히터가 약해지고, 속도가 느려지면 히터가 강해지는 현상으로, 정비소의 실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