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 일기

오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88번 버스에 올라탔다. 빈 자리는 종종 있었지만 통로 쪽이 빈 곳은 한 곳 뿐이었으므로 그 자리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엉덩이 밑에는 버스의 뒷바퀴가 돌고 있었다.

전철에서부터 계속 졸고 있었으므로 버스에서도 역시 절반쯤 가수면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나머지 절반의 의식으로 물리학도와 블로거와의 관계를 따져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 자리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꽃다발을 들고 내리려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일어서서 비켜줄까 아니면 그냥 다리 방향만 바꿔줄까 하고 고민을 잠시 해 봤는데 졸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차니즘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가씨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버스 손잡이 링을 붙잡고 조금씩 조금씩 복도쪽으로 게걸음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남자가 여자로 변신한 뒤에 처음 하이힐을 신고 걷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88번 버스기사들은 운전이 거칠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 아가씨는 자주 주춤거렸고, 혹시나 싶어 이 아가씨가 넘어질 때를 대비해서 받”힐” 준비를 해야 했다. 졸려도 일어서서 비켜줄 걸… 이란 후회를 하면서 버스에서 완전히 내려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 아가씨가 내린 자리의 앞 의자에 달린 손잡이에는 백합꽃이 몇 송이 꽂혀 있었다. 들고 다니기엔 너무 커서 빼 놓은 것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백합은 수술들은 사라지고 암술만 외로이 버티고 있었다. 아마 백합을 꽃다발에 넣은 꽃집 점원이나 원예상 혹은 농가에서 꽃을 좀 더 오래 보관하고, 옷이나 다른 꽃들이 지저분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술들을 모두 제거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합꽃가루는 갈색이 나는데 색이 진해 눈에 잘 띄고 옷에 묻으면 물이 심하게 든다. 더군다나 백합 꽃가루는 표피가 우툴두툴하기 때문에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으므로 멀쩡한 옷을 버리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좀 더 보기 위해서 백합의 수술을 제거했다. 단지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꽃은 식물의 생식기다. 생식기를 사람들이 맘대로 따서 맘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식물의 생식기는 곤충같은 동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식물의 생식기를 맘대로 따서 이용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정당하지 않은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꽃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이용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냥 그렇게 이용당하다가 버려져도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름다움은 어떨까? 매년 Miss Korea를 뽑고, Miss Universe를 뽑는다. 성의 상품화라면서 비난이나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도 대중매체와 언론들은 이 상품으로 포장된 여성들을 팔아먹기 위해서 난리가 난다. 올 해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의 아름다움(그게 아름다움이라고 하자면)도 버려저도 괜찮은 것일까? 꽃이 이용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미인대회에 나온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이용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조금 존재하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동종의 생물에 의해 이용당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식물의 꽃보다 더 이용당하기 위한 존재라는 판단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원하는대로 이용하고 그 뒤 휴지통에 그대로 처박아 버려도 상관없는 것일까? (좀 더 생각을 한 결과 이 주장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_-)

졸음에 겨운 눈꺼플을 힘들게 들어올리고 주위 건물을 다시 살펴봐야 했던 건 역시 내려야 할 곳이 다가오고 있다는 본능적인 감각의 외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던 도중 나는 그만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한 칸 뒤의 옆 쪽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 커플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자애의 다리 하나가 남자애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고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내 머리 속의 잠은 순식간에 버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여자 아이가 쥐가 나서 그런 줄 알았다. 보통 삼복더위로 넘어가기 직전인 이맘때면 쥐가 잘 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며칠 전에도 쥐가 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될듯 했다. 그러나 금방 상황을 판단하자니 다리에 쥐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에 가방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 밑으로 하얀 팬티가 훤히 보이고 있었다. -_-?
그런데 가만히 보니 사실 처음에는 남녀커플인 줄 알았던 그들은 녀녀커플이다. 이 커플의 정체는 무엇일까?


위의 글은 실제로 1시간 전에 약 10분정도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본 것과 든 생각들을 그대로 나열한 것이다. 글의 완성도를 위해서 약간씩 추가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문맥을 매끄럽게 잡기 위한 것이지 내용은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이후에 아파트 단지를 걸으면서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남녀남 한 쌍을 봤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버스에서 본 것들은 단지 우리 DNA에 코딩된 신의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렇지 않다면 미묘하지만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비슷한 행동패턴을 보이는 것인지???

오늘은 피곤하여 힘들기도 하지만 하루가 끝나가는 마당에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 하루이기도 하다.

One thought on “황당 일기

  1. 공공장소에서.. 노출, 스킨십은 좀 자제를 ..;해야할것 같네요 ;이건 매너..;

    그런데 꽃이 식물의 생식기라고 생각해 보니 좀 ..;
    흠.. 그걸을 꺽어서 가지고 노는 사람들 이란 생각을 해보니 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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