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과 시간굴절』- 킵 S. 손/이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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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과 시간굴절 – 아인슈타인의 엉뚱한 유산

(Black Holes & TimeWarps)
킵 S. 손 Kip S. Thorne / 박일호
이지북 ez-book (2005) / Harold Ober Associates Incorporated (1994)
양장 / 632쪽 / 3,7500원
ISBN 89-5624-154-6 04420

※ 이 책의 내용에 관련된 궁금증만 있는 분은 이 글의 뒷부분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날 조카가 검정의 매우 두꺼운 책을 학교에서 대출해왔다. 대출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다 읽지 못할 것 같은 두껍고 어려운 분위기가 풍기는 책이었다. 제목을 보니 더욱더 가관!!! 『블랙홀과 시간굴절』이란 제목은 물리학을 전공했던 나조차도 호락호락하지 않을거라는 느낌이 밀려왔다.
조카가 이 책을 대출해온 것은 내가 이 책을 좋아할 거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조카 학교의 대출기간은 2주였고, 난 2주동안 이 책을 들고다니면서 겨우 프롤로그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다른 책들을 병행해서 읽고 있었던 것이 몇 권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책들과 비교해서 독서 진도가 너무 안 나간 축에 속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SF소설 형식으로 되어있는 프롤로그는 너무나 근사했고, 나는 이 책을 주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카의 소개로 이 책을 주문한 뒤 이 책을 다시 잡아서 다 읽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동안 읽을 책들도 많았고, 우여곡절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다시 집어든 뒤로 지금까지 두 달동안 읽어야 했고, 오늘 개미들과 잔치를 치르면서 일단은 다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잘 써진 책이었음에 틀림없다. 내용은 아주 재미있었고, 간간히 학부생 전공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 양자역학을 공부할 때 이렇게 해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주옥같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이 책의 옮긴이 박일호 님과 편집자 김동영(?) 님은 물리학에는 문외한이라는 점이다. 그 덕분에 초반을 넘어가면 중반의 어려운 내용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미묘한 오류들이 살짝살짝 등장한다. 이런 오류들은 중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저학년이 이 책을 읽을 때 심각한 오류를 동반할 수 있어 염려스럽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오류는 대부분의 번역책에는 등장한다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자.

그러나 둘째 번역의 무성의함은 용서할 수준을 넘어선다. 5장을 넘어서면 번역을 어떻게 한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른다. 어느정도냐 하면 옮긴이와 편집자가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서게 할 정도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X선이 지구의 대기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천문학자들이 갖는 문제점이다(당신이 인간인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X선은 암과 돌연변이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 305쪽

그러나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야 한다.

X선이 지구의 대기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천문학자들이 갖는 문제점이다(그러나 X선은 인간에게 암과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예는 단순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것 중에서 한 개를 뽑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 번역기를 돌린 것 같은 – 오역이 한 쪽에 한두 개씩은 계속 발견되었다. 결국 이 책의 중반부에서 독서 속도가 많이 느려졌던 것은 이 책이 어려운 이유도 있었겠지만, 번역이 잘 된 것인지, 번역이 잘 안 됐다면 원래의 뜻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확인해본 결과 한 시간동안 열심히 읽으면 여덟 쪽을 읽을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 정도라면 비슷한 수준의 다른 책 읽는 속도보다 절반이 채 안 되는 속도다.

셋째는 단순히 이 책의 제본상태가 약하다는 점이다. 최근들어 아무리 들고다녀도 책의 제본이 뜯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등짝이 뜯어져 나가고,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지는 수준이 되었다. 물론 내가 이 책을 좀 혹사시킨 경향이 있긴 하다. 두 달을 거의 매일같이 들고다니면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슷한 크기의 다른 책인 『엘러건트 유니버스』 또는 훨씬 더 두꺼웠던 파인만의 『Lectures on Physics』나 『빈 서판』같은 책들도 최소 한 달은 들고 다녔는데도 뜯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 책의 제본은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거 교환받고 싶지만 산 지 3년이나 지난 책을 교환받는 것은 무리겠죠? ^^;;)

결국 위의 세 가지 문제점은 일반인이 이 책을 읽기 힘들게 만든다. 이 책이 대학교 추천도서 등에 포함되고, 많은 사람들이 교양과학도서 중에 필독서 목록에 넣는 것 같아서 좀 염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오타와 오역이 즐비했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처럼 책의 가치를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원작이 갖는 훌륭함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킵 S. 손은 재미있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읽다보면 역사 이야기, 물리적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서 읽다보면 독서 흐름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는 정확한 것처럼 생각되고, 『별의 물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분야에 대한 책이 전무한 국내 실정에서 이 책은 삼복더위 때악볕에서 한 줄기 소나기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든다. 한편으로는 『별의 물리』에서 아리송하게 설명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들이 있기 때문에 이 두 책을 모두 읽으면 천문학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두 권의 책을 지금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두 품절!!!)

ps. 나는 지금 이 책의 원서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원서 읽기가 가능하면 원서로 보길 권한다.


책의 내용 설명

이 책은 천체물리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체물리학이란 별들에 대한 물리학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우주의 기원, 은하의 기원, 별의 일생과 종류, 우주의 미래, 천체의 종류 등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천체물리학적 발견은 우주 초기의 은하의 탄생배경, 별의 질량 상한선에 대한 발견 등이 있고,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초기 은하들의 대규모 에너지 방출 등에 대한 미스터리가 관측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내용도 알아야 하고, 그 배경에는 별, 백색왜성, 중성자별, 블랙홀 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책에서는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에 대해서는 논증이 약간 부족한 측면이 있으나 이는 이 책이 출간된 1994년 이후 발견되고 연구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로필로 짧은 SF소설로 시작한다. 블랙홀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우주선을 타고 블랙홀을 연구하러 여행을 다니는 한 과학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블랙홀에 대해 흥미만 있고, 실제로 관련서적을 읽기를 겁내던 분들에게는 유익할 것이다.

1장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의 여정과 고뇌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위인화되지 않은 상태의 인간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의 단점투성이인 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 어떤 책에서도 읽은 적이 없다. (심지어는 아인슈타인 전기에서도 이야기되지 않던 내용들이 꽤 들어있다.)
2장에서는 그 뒤 민코프스키 공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무시, 그리고 몇 년 뒤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민코프스키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수학적 도구들을 손에 넣은 아인슈타인이 어떤 연구를 통해서 일반상대성이론에 접근하려 했는지와 그 사이의 숨은 일화 등도 소개된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옛 동료들의 이야기가 많이 삽입된 것 같다.)
3장은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일반상대성이론의 텐서로 이뤄진 중력장방정식에 대한 풀이를 놓고 수십년간 펼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꽁생원 물리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4장부터 9장까지 5개장은 여러 물리학자들이 했었던 수십년간의 논쟁과 결과적으로 옳다고 밝혀진 백색왜성과 중성자성, 그리고 블랙홀에 대한 선구자적 예측을 했던 사람들과 이를 무시하려 했던 권위자들에 대해서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과학자 집단도 일반 사회의 조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4장에서 9장까지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특히 츠비키라는 물리학자는 인상깊다.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에 수십년을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멋진 주장을 했다고 전해진다는 이 사람은 너무 시대를 앞서가면 결과가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 부분을 읽는데 번역이 안 좋아서 무척 고생했다. (사실상 내용을 온전히 이해한 것인지조차 확신에 서지 않는다.)
10장은 중력파, 11장은 블랙홀에 대한 몇 가지 유명한 패러다임에 대해서 나오는데, 번역이 너무 개판이라서 결국 이해하는 것은 포기했다. 정확한 번역이었다면 무척 재미있었을텐데 하는 느낌을 받았다.
12장은 『시간의 역사』를 저술한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몇몇 물리학자들이 블랙홀은 증발한다는 연구를 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번역은 아주 엉망이었지만, 이 내용을 보고 개략적인 블랙홀 증발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3장과 14장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인 블랙홀 내부와 시간여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두 장을 전개하면서 저자는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는 모든 책임을 물리학자들의 양자중력에 대한 초보적 이해수준으로 돌리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ps.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내용과 비교되어 너무 번역이 안 좋아서 9장과 10장을 타이핑하면서 번역을 고쳐봤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나머지 부분도 모두 타이핑해보고 싶다.

ps. 추천도서 읽는 순서 추천
    『우주의 구조』 → 『시간의 역사』 → 『블랙홀과 시간굴절』 → 『엘러건트 유니버스』

7 comments on “『블랙홀과 시간굴절』- 킵 S. 손/이지북”

  1. 핑백: melotopia
  2.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나름 천체 물리학에 관한 책들은 두루 섭렵했지만요..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직적 번역하신 본을 메일로 받아볼 수 있을까요?

    초면에 참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kdsohn@gmail.com

  3. 언제가 엉터리 번역 때문에 무지 열받은 적이 있었지요…^^ …수리철학에 대한 책이였는데… 이해가 안되는 수준이 아니라… 문장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

    (“나는 그와 같이 의미하지 않는다” – 그러면 당신이 그것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나에게 보여주시오. 그러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러한 대응이 가능한지를 그 그림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가? –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 그림은 또한 그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지 않아야만 한는가? …

    앞 문장이 어떤 뜻일까… 특별히 번역이 이상한 곳을 골라낸 것도 아니다… 그냥 책을 펼쳐 눈에 띈 문장을 옮긴 것….)

    … 암튼 요즘 나오는 책들은 그래도 번역이 좀 나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1. 에효~ 그나마 요즘엔 번역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정도로 제 실력이 향상되서 다행이에요. 예전에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이해하려고 무진장 노력했었다는…ㅜㅜ

에삼초이 에 응답 남기기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