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새 발전 5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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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날 : 2014.10.17

사진을 제대로 찍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카메라만 들면 좋은 사진을 찍을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옛날, 그러니까 대략 2000 년 정도까지는 이 말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값비싼 카메라를 갖고 있다는 건 사진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카메라가 가정당 한 대씩은 보급돼 있고, 더군다나 스마트폰에 달린 카메라까지 생각하면 어느덧 전국민의 찍새화가 이뤄진 상황이다. 이렇게 된 것이 상향평준화를 불러왔다면, 좋은 카메라만 들어도 좋은 사진을 담는 찍새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비싼 카메라를 갖고 있는 사람을 보면 작가나 사진기자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사진을 찍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된다. 사진은 카메라 이외의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비싼 카메라를 산 사람은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다.

정말 좋은 찍새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산 뒤에 어떻게 발전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게 좋을 듯 싶다.

1. 메뉴얼 단계

메뉴얼(사용설명서)에 무엇이 써져있는지 읽어보고 그대로 찍어보는 단계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진찍기를 익히는 단계다. 그래서 카메라를 처음 산 사람들이 찍는 사진은 대부분 메뉴얼이나 자기 방 천장 사진이다. 메뉴얼에 안 나와있는 건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촬영방법을 찾아보거나 커뮤니티에 질문을 올려 답변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러면서 왜 안 되냐고 투덜댄다. 사진 초보가 커뮤니티에 질문을 올리면 가장 많이 받는 답은 이것일 듯하다.

‘ 카메라 메뉴얼을 다섯 번 완독하세요.’

1 단계에서는 메뉴얼에 나와있는 내용도 이해하지 못해서 너무 쉬운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때는 창작력과 의욕이 충만하다. 제대로 된 사진은 거의 찍지 못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이때의 창작욕과 의욕을 5 년만 유지하면 누구나 수준 높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경험 단계

메뉴얼을 거짐 알게 되면 기계적으로 카메라를 완전히 다룰 수 있는 수준이다. 이 말은 물리와 정보 측면에서 원하는 모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기본을 바탕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는 단계다. 대부분의 찍새는 이때부터 즐겨찍는 게 결정된다. 즉 특정 분야의 사진을 주로 찍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단계의 사람은  이러이러한 수준의 사진이네 하며 남 사진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1 단계보다는 덜 하지만 충분히 행복하며,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곳을 방문한다.

3. 형이하학적인 단계

카메라 조작방법과 사진을 찍는 경험이 충분한 사람은 자기만의 수련을 통해 거듭나기를 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단계의 사람들은 특징적으로 물리적인 촬영훈련을 통해 사진의 깊이를 더해가려고 한다. 가기 힘든 곳으로 여행가거나, 만나기 힘든 상황을 찾거나, 손으로 들고 개방시간을 길게 하거나 해서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즉 흔히 알려진 촬영조건과 방법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이 제시하는 방법을 무턱대고 따라하다간 망하기 쉽다. 맨손으로 카메라를 들고는 ‘셔터를 1/10 초로 개방해 접사하기’, ‘2 초 동안 군중 움직임 찍기’ 같은 방법을 주로 제시하거나, 어떤 정형화된 방법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이런 건 따라하기 무척 어려워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 지도를 받는 1 단계 사람들이 주로 투덜대는 이유!

4. 형이상학적인 단계

3 단계에서 형이하학적인 수련을 넘어선 다음에는, ‘사진이란 무엇인가’ 같은 형이상학적인 내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스스로를 더 깊은 수준으로 계발하기 위해 수련한다. 이미 이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에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어디에 내놔도 고수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대부분은 (김난도 교수가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게으름의 다른 말이라고 일갈했던) 슬럼프에 빠진다. 안 빠질 수가 없다.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좌절과 불만에 빠지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건 쓸모없는 일이란 걸 잘 알기에 더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5. 철학 단계

자기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다. 기술적으로 모든 것을 마스터한 상태인데도 매우 쉬운 사진을 찍으므로 누구나 별 것 아니라 생각하기 쉽지만, 따라하기는 무척 어렵다.

남들과 사진에 대해 대화해도 기술적인 언급보다는 4 단계의 슬럼프를 극복할 방법 정도만 간간이 언급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카메라는 기계를 좋아하는 사람도 익히기에 복잡해서, 카메라를 산 사람은 대부분 1 단계를 넘지 못한다. 그래서 사진 커뮤니티에서는 카메라를 장농 속에 보관한다는 이야기가 유행한다. 어쩌다가 2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사진에 대한 생각을 계속 발전시킬 짬이 별로 없기 때문에 계속 계발하지 못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2 단계까지는 그냥 일반 사용자다. 검찰이 얼마 전에 죽었다고 발표한 (그리고 국민들은 모두 국외로 도피했다고 믿는) 구원파 교주 유병언도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사진을 보자면 1~2 단계 쯤의 사람이다. 아마 1 단계 사람인 것 같다. 좋은 장비를 자동모드로 설정해서 이것저것 막 찍었던 것 같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찍은 건지 의문이 든다.)

2 단계에서 3 단계로 장기간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험에 따른 고집만 세지고, 철학과 실력은 부재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잘 찍는 수준에서 남들보다 튀어보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게 된다. 사진을 찍는다며 새를 괴롭히고, 야생화를 짓밟으며, 금강송을 베어내거나 출입금지된 곳을 무단으로 들락거리는 사람 대부분 이 단계의 사람들이다.

3 단계만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대단해 보이는 수준이다. 최소 2 년은 사진에 집중해서 노력을 기울여야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 이정도 단계에 오른 사람은 몇 번쯤은 공모전에서 입상한 경력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사진촬영으로 밥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사진관 같은 곳에서 결혼식, 백일잔치 등을 촬영하거나 사진기자를 한다.

4 단계는 거의 작가다. 이 세계는 나도 모르겠다. ^^; 우리나라에서는 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평하해주지 않기 때문에 거의 생활 유지가 힘들 것이다. TV 방송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가로 출연하는 사람 대부분이 3~4 단계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P&I 같은 행사장에서 수준 낮은 전시회를 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5 단계는 프로작가다.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있는지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간혹 행사 같은 데 나와서 강의하거나 대학교수를 하거나 한다. 물론 대학교수를 하는 사람도 실제로 실력이 프로인 경우는 별로 없다. 특히 옛날 필름카메라로 익힌 사진술을 디지털시대에도 유지하고자 하는 고집불통인 사람이 많다.


이렇게 발전하는 과정을 짧게 적어봤다. 그런데 난 이제 겨우 메뉴얼을 안 보게 됐으니, 2 단계가 막 된 것 같다. 부끄럽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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