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미끄러운 진짜 이유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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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밖에는 스키나 썰매를 타는 분들은 좋아할 정도로 눈이 아주 많이 온다. 하지만 외출하려면 비탈길을 꽤 멀리 걸어거야 하는 나는 눈길을 걸어 내려가다 자주 미끄러지곤 했기 때문에 이런 날씨를 싫어한다. 길이 미끄러워 교통대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으니, 이런 날은 집안에 콕 박혀서 글이나 쓰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모임이 있어서 귀찮아도 나가봐야 한다. ㅠ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눈과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기존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론은 아래와 같다.

  1. 얼음이 무언가에 눌렸을 땐 잠시 녹아 물로 된 얇은 막(수막)이 생겨서 미끄러워진다.
    존 졸리(John Joly, 열역학 법칙의 켈빈 경 동생이라고 한다.)가 1886 년에 발표했던 논문에서 주장했다. 비오는 날 길이 미끄러워서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기 쉬운 것과 같은, 경험과 잘 일치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따라온다. 얼음이 그렇게 쉽게 녹았다가 다시 얼 수 있는 걸까? 무게가 어느정도 이상 되어야만 미끄러운 것이 아닐까? 추워질수록 더 무거운 무게가 필요해지는 게 아닐까?
  2. 얼음 위에 올라가 있는 물체가 움직이면 마찰에 의해서 얼음이 녹아 수막이 생겨서 미끄러워진다.
    프랭크(Frank P. Bowden)가 1939 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던 주장이다. 역시나 여러 가지 의문이 따라온다. 아주 추운 곳에서도 미끄러울 수 있을까? 안 움직이는 물체도 미끄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3. 얼음은 원래 마찰계수가 작다.
    위의 두 이론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론이 제시되지도 않자 현대에 와서 제시됐던 이론이다.

이 이론들은 일부 조건에서 얼음을 이용한 여러 가지 실험을 설명해준다. 그래서 이 이론들은 과학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이론들이 좋은 답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고, 추운 남극이나 스위스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의 냉동고 같은 동굴에 실험실을 만들고서 좀 더 깊이 연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답을 찾지는 못했다.

지금 답으로 알려진 연구 결과를 살펴보기 이전에 몇 가지에 대해 살펴보자.

1. 빙하의 특성

빙하(氷河)는 얼음의 강이다. 그러나 강이 얼어서 생기는 게 아니고, 눈이 쌓여서 생긴다. 눈이 많이 쌓이면 자기 무게에 눌려서, 아래쪽은 점점 공기를 밖으로 방출하고 얼음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빙하는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다가 녹아 강이 되거나, 바다에 이르러 붕빙(崩氷)이 된다.

그런데, 빙하는 어떻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걸까? 빙하 속으로 흐르는 물 때문이다. 빙하의 구멍을 통해서 여기저기서 조금씩 흘러내린 물이 밑바닥에서 흐른다. 물은 얼음 밑으로 모여들면서 환경에 맞게 주변의 얼음을 녹여 구멍을 점점 크게 만든다. 점점 커지던 구멍은 빙하에 가려 보이지 않는 큰 강이나 물웅덩이가 되기도 한다. 그 구멍은 때때로 고층건물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 심지어 저수지만큼 커졌다가 밑쪽이 수압으로 붕괴되어 빙하 끝으로 물을 뿜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빙하 하류에 있는 마을을 통째로 수몰시킨다. (그래서 대부분의 빙하 주변 마을에서는 안전을 위해서 다이너마이트를 빙하 끝에 폭파시켜서 구멍이 너무 커지기 전에 빙하 끝단을 붕괴시킨다.)

그런데 빙하 안이 얼음이 녹을 정도로 온도가 높은 건 아닌데, 어떻게 빙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일까?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의 모레노 빙하

2. 얼음의 구조

얼음은 육각형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꼭 눈이 아니더라도 분자 수준에서 보면 얼음은 눈과 구조가 같다. 그러나 얼음이든 눈이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구조가 있다. 바로 물과 구멍이다. 얼음은 고체 부분이 뼈대를 만들고, 뼈대 사이에 구멍이 숭숭 뚤려있다. 구멍은 프렉탈 구조로 이뤄지는데, 작은 구멍이 점점 더 큰 구멍에 연결되는 규칙성을 반복한다. 그 구멍 안에는 아직 얼지 않은 물이 들어차 있다.

여기에서 물이 중요하다. 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단번에 얼음으로 바뀌지 않고,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서 아주 서서히 얼음으로 변한다. 그래서 얼음은 비열이 1 Cal/cm3인 물보다는 작지만, 보통 물질보다는 크다. 그러다가 온도가 내려가면 물이 적어지면서 비열도 낮아져서, 매우 낮은 온도에서는 0.5 Cal/cm3 정도가 된다.

얼음의 높이가 매우 높으면 얼음 속 구멍의 높낮이 차이도 커진다. 그러면 구멍에 들어있는 물을 지탱하는 힘인 표면장력보다 물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이 더 강해진다. 물이 밑으로 흘러내릴 것이다. 이 현상은 온도가 높아 물이 많아질수록 더 강하게 일어난다. 결국 윗부분의 구멍은 물이 빠지면서 구멍이 비어 공기가 많아지고, 아래쪽의 구멍은 물이 더 많이 찬다. 물은 상식적으로 투명하지만, 사실은 붉은색을 푸른색보다 아주 조금 더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물이 가득 찬 얼음은 게토레이 색으로 보인다. (게토레이는 시원함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빙하와 같은 색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꼭 빙하가 아니라 두껍게 언 강물만 보더라도 아래 부분은 색이 푸르고, 윗 부분은 빈 구멍에 의해 빛이 산란되어 희게 보인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온도가 낮을수록 얼음이 단단한 이유도 알 것 같다. 뼈대 역할을 하는 얼음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흰 얼음도 투명한 얼음보다는 더 약할 것이다.

3. 얼음의 특성

다시 말하자면, 0 ℃의 얼음 안에는 물이 매우 많고, 온도가 낮아질수록 물의 양이 점점 줄어든다. 얼음 위의 수막도 마찬가지여서 온도가 낮아질수록 점점 얇아진다. 그러다가 -148 ℃가 되면 모든 물이 얼음으로 바뀐다.

수막이 없는 얼음은 어떤 상태일까? 추운 스위스의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의 냉동고 연구시설이나 남극에서 관측된 눈과 얼음은 -60 ~ -50 ℃ 정도까지만 미끄러운 현상이 관찰된다. 그보다 온도가 낮으면 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꼭 마른 모래알처럼 미끄럽지도, 뭉쳐지지도 않는다.

눈이 기온이 높을 때 함박눈으로, 기온이 낮을 때 가루눈으로 오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수막이 두꺼울수록 표면장력이 세져서 더 쉽게 달라붙어 덩치가 큰 함박눈이 되는 것이다. 가루눈보다는 함박눈이 올 때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기 더 좋다는 옛 어르신의 말씀이 바로 이해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쉽지 않으므로, [구름을 사랑하는 기술] 같은 책을 따로 살펴봐야 한다.)

얼음의 이런 특성은 진흙의 특성과 비슷하다. 진흙창은 말랐을 때는 그냥 흙바닥이고, 부서지면 흙먼지이다. 그러나 한 덩어리로 뭉쳐 젖으면 다시 진흙이 되어 매우 미끄럽다. 더군다나 진흙을 쌓아두면 표면에 물이 흘러나오면서 지도 위에 선으로 그어진 대평야 위의 강 같은 흔적이 생기는데, 이게 얼음이 녹을 때 얼음 위에 생기는 홈과 무척 비슷하다. 빙하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이유와 진흙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이유가 같았던 것이다. 이는 얼음과 진흙이 (미세구조는 꽤 차이가 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무너져 내리는 모레노 빙하

얼음 표면에 있는 물은 얼음의 많은 특징을 설명해준다. 얼음끼리 붙여놓기만 해도 서로 달라붙어 하나가 되는 현상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얼음에 철사를 걸어두면 철사가 얼음을 관통하여 아래로 떨어진다. 얼음이 무언가에 눌려서 녹지 않더라도, 수막현상 때문에 미끄러운 건 당연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등장한다. 물이 얼음을 뒤덮을 때 어떤 구조가 만들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물이 얼음 위를 뒤덮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실제 얼음의 특성은 좀 다르기 때문에 빗길에 생기는 수막보다 더 미끄럽다. 얼음과 물 사이에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얼음 위에 형성되는 물막을 준액체층(Quasi-liquid layer)라고 부른다. 준액체층에서는 물리적 특성 뿐만 아니라 화학적 특성도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준액체층 안의 물은 마치 기름처럼 점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수막보다 훨씬 미끄러운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얼음의 이런 성질은 이미 많은 곳에서 이용되고 있다.

스피드 스케이트를 타기 위해 만드는 빙판은, 얼음 밑에 매우 찬 냉각파이프를 설치하고, 공기는 영상의 기온을 유지한다. 얼음이 차가우면 단단해서 스케이트날이 쉽게 박히지 않아 위험하지 않고 관리도 쉽다. 반면에 공기가 뜨거우면 얼음 표면의 수막이 두꺼워서 더 미끄럽다.

피겨 스케이트를 탈 때는 스피드 스케이트를 탈 때보다 빙판과 공기를 더 차갑게 만든다. 스피드 스케이트를 타는 얼음은 무르고 너무 미끄러워서 점프와 회전을 할 때 착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컬링은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컬링 경기장에서는 얼음바닥 위에 물방울을 뿌려서 만든다. 물방울은 얼음 위에서 그대로 얼어서 엠보싱처럼 된다. 이런 구조는 컬링 스톤(돌)이 잘 미끄러져 더 멀리 갈 수 있게 만든다. (선수들은 이 엠보싱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케이트를 신지 않는다.) 이때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우선 돌의 회전이다. 돌이 움직이면서 회전할 때 돌이 회전하는 방향으로 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글이 시작될 때 말씀드린 세 이론 중에 2 번째 이론이 작용하여 더 빨리 움직이는 부분에 얼음이 더 많이 녹아서 마찰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빗자루질(스위핑)을 하여 위의 이론 중에 2 번째 이론에 따라 엠보싱 위의 얼음이 더 많이 녹아서 돌이 움직이는 방향이 휘거나 더 멀리 미끄러지게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에 대한 정답은 얼음 표면이 원래 물로 뒤덮여있기 때문이다. 이 답은 여러분도 익히 아실만한 과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Micheal Faraday)가 1850 년에 발표했던 주장이었다.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에 대한 첫 논문이었다. 최근에 얼음 위에 있는 분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패러데이의 논문이 맞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다른 이론이 아예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그동안 명료하게 정답을 확정하지 못해왔던 것이다.

4. 재미있는 실험 1

재미있는 가상실험 하나 소개한다. 이 실험을 성공하려면 물감을 잘 선택해야 한다.

– 준비물

얼음, 물감, 냉장고, 얼음을 팔 수 있는 끌

– 실험방법

  1. 얼음을 조금 크게 얼린다.
  2. 얼음 위를 오목하게 파낸다.
  3. 파낸 얼음 홈에 물감을 탄 물을 붙는다. 물 온도가 너무 높으면 안 된다.
  4. 냉장고에 이 얼음을 넣고, 얼음이 녹지는 않지만 최대한 높은 온도인 0 ~ -2℃로 유지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살펴보면 물감이 얼음 안쪽으로 스며든 모습을 볼 수 있다.

5. 재미있는 실험 2 (추가 : 2021.08.02)

얼음의 온도에 따라 전자렌지에 의해 가열되는 속도가 다르다. 전자렌지의 전자파가 물은 가열할 수 있지만 얼음격자에 고정된 물분자는 가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0 ℃에 가까운 얼음은 쉽게 녹지만, 냉장고에 의해 -5 ℃로 언 얼음은 1~2 분은 안 녹고, 액체질소로 얼린 얼음은 그보다 훨씬 오래 안 녹는다. 그런데 매우 차가운 얼음이더라도 손으로 잡아서 전자렌지에 넣는다면 매우 쉽게 녹을 수 있다. 체온에 의해 표면에 물이 생길 수 있고, 이 물이 전자파에 의해 매우 빠르게 가열되어 얼음 전체를 순식간에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액체질소로 얼린 얼음은 얼음 안쪽에 액체 상태의 물분자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겉표면이 녹아 물이 생길 때까지 전혀 가열되지 않는다.

직접 온도를 다르게 한 얼음을 전자렌지에 넣어보면 어떨까?

ps. 2021.12.23 추가
이 글은 유투브 ‘카오스 사이언스’ 채널의 ‘[생중계] 강연쇼_미래과학편 by 박문정_정연욱 2021 대한민국 과학기술대전’ 영상의 자료로 약간 보충되었다.
참고로, 원래 이 글은 맨 앞에 소개한 세 가지 이론만 알고 있던 십수 년 전에 내 수첩에 메모되었고, 10여 년 전에 (어떤 모임에 가기 직전에) 원고로 작성되었다. 당시에는 패러데이의 이론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얼음의 성질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고민한 결과는 패러데이의 이론이 답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음에 대한 여러 성질과 현상에 대해 이미 많이 들어 알고 있던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니, 그런 정보 없이 같은 결론을 내린 패러데이가 얼마나 통찰력이 좋은 과학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증명할 방법이 없다가 기술발달로 얇은 원자막도 관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ps에 2022.07.30 추가. 준액체층의 점성 변화는 ‘[과학하고 앉아있네:물리학자들 S8E01]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 김현철 교수와 오정근 박사의 연구 이야기’를 보고 추가했다.

ps. 2022.04.30 추가
스키를 탈 때는 회전하려는 방향의 반대쪽 발에 힘을 주라고 한다. 그래서 눈을 누르는 압력이 변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쓰면서 발에 힘을 줘봤는데, 그래도 실제로 반대쪽 방향으로 회전했다. 이건 왜 그런 걸까?
ps의 ps. 스키에 대해서는 미스테리가 한 가지 더 있는데, 회전할 때 길쭉한 스키에 눈이 걸리기 때문에 회전하는 걸 설명할 수 없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회전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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