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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약간의 기억력은 필요하다.

[경험담]

1.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의 비애

나는 기억력이 많이 나쁜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빴다. 장기기억력은 문제가 없었는데, 순간기억력이 문제였다. 자주 준비물을 안 가지고 학교에 갔고, 무엇을 하다가 말고는 뭘 하고 있었는지 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상당히 많이 고생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2 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건망증이라고 놀렸다. 교육적으로 아주 안 좋은 것인데…..

또한 대인관계에 문제가 컸다. 사람을 만나면, 얼굴은 기억하는데 그것이 누구였는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이름도 기억하고 얼굴도 기억하는데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면인식장애와 비슷하다!

공부도 당연히 고생했다. 굉장히 좋아해서 항상 90 점을 넘게 받던 자연 과목에서도 별자리나 생물 종을 공부하는 부분만 나오면 예외 없이 80 점 받기가 힘겨웠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공부를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90 점 넘는 학생이 별로 없었다.)

2. 기억력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은 쉽게 티가 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서 핀잔이나 야유를 듣고, 스스로도 불편하다.

특히 공부는 기억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문제나 법칙은 외워두고서 천천히 이해하라는 말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그렇게 하기 힘들다.

2.1 수학

수학은 정말 암기력이 별로 필요가 없었다. 흔히 알려진 공부방법에는 수학도 80%는 암기에 의존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보면 천재적인 아이들은 다르다는 토가 붙어있다. 처음의 나는 별로 수학을 잘 하지 못할, 그저 재능만 뛰어난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력이 나쁘다는 것이 뛰어난 재능을 능력으로 바꾸어 주었다.

우선 다른 아이들은 잘 안 풀리는 문제들을 외워서 공부했다. 하지만 나는 외워봤자 곧 잊어먹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본원리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더디지만, 별 공부를 하지 않고서도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하는 방법을 개선해 나갔다. 중학교 때부터는 언제나 최상위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고, 특히 경시대회 같은 문제로 평가하는 경우는 더욱 더 높은 성적을 받았다.

정리하자면, 처음 개념을 제시받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만, 일단 받아들인 뒤에는 남들보다 더 깊은 수준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수학이란 것이 공통점을 찾는 과목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2.3 국어, 영어의 경우

(이 꼭지는 기억력과 별로 관계가 없을 것이다.)

국어는 글쓴이에게는 모국어이고, 영어는 외국어이다. 최근 게놈의 연구 진행 결과를 보면, 모국어와 외국어에 대해서 뇌가 반응하는 과정이 틀리다고 한다. 언어능력이 많이 부족한 글쓴이의 경우에도 국어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아도 평균성적은 유지했었는데 영어는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도 머리에 남는 게 없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20 개 적어들고 외우면서 등교해도 20 개는 고사하고 10 개 외우질 못했다. 그리고 아직도 이에 대한 대비책은 발견하지 못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되지 않는 것이 영단어 암기였다. (영어 선생님들은 이런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지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반면 국어는 그리 외우지 않아도 그럭저럭 쫒아갈 수 있었는데, 딱 두 번은 자신감을 갖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기억은 중학교 3 학년 때에 담당교과목 선생님의 출산으로 임시로 오셨던 허은영 선생님께 배울 때였고, 두 번째는 재수하면서 유두선이라는 전문 국어강사에게서 배울 때였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지금 생각해 보면 별다른 것이 아닌 국어를 가슴으로 느끼는 방법을 가르치셨던 것인 듯하다. 다른 국어선생님은 모든 것을 지식으로 전하며 암기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끝까지 적응하지 못했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국어라는 과목은 약간만 외우면 (모국어이므로 거의 암기할 것이 없다.) 다 잘할 수 있다.

가장 혐오스러운 국어선생님은 시를 외우라고 하는 분들이다. 또한 고어에서 훈민정음을 외우라고 하시는 분들도 혐오스럽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공부하다보면 외워지게 된다. 왜냐하면 한 단어를 공부하는데 5 분씩 걸리는데, 이렇게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외워진다. ^^; 반면 시는 외워서 될 것이 아니다. 시는 시인의 감성을 노래한 것인데, 이것을 외워서 뭘 하겠는가? 가르치는 사람이 능력이 안 되니 그렇게 공부하라고 시키는 것이 아닐까?)

2.4 과학과목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과학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들이다. 이 과목들은 기본 암기만으로 대부분 해결이 가능하고, 이후에는 거의 외울 것이 없다.

물리는 이해만으로도 95% 정도의 문제를 충분히 풀 수 있다. 수학처럼 처음 적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지만, 일상생활과 연관이 크기 때문인지 수업만 듣고도 충분히 잘 할 수 있었다. 다만, 딱 한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바로 파동의 간섭 부분이었다. (결국 수업이 끝난 뒤부터 매일 저녁에 2.5 시간 정도 동안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기를 반복해서 1 주일만에 적응했다. 이때 적응한 지식으로 대학교 2 학년까지 잘 써먹었다.)

화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겨울방학 기간 동안 졸업식에서 부상으로 받은 국어사전을 탐독(?)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됐다. 국어사전에 있던 화학에 대한 용어를 보면서 자연스레 적응했기 때문이다.

생물은 종 이름 같이 외울 것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가 생화학에서 나오는 수많은 반응도 따로 외워야 했다. 이런 점 때문에 과학과목 중에는 생물을 가장 싫어했다. 당시 대입시험에 과학과목을 2 개 선택해야 했는데, 나는 당연히(?) 생물을 제일 처음 제외했다. (그래도 못했던 것은 아니다. 고3 때 생물선생님은 수업을 하다가 이전에 배운 것을 아이들이 모르면 내게 뭐냐며 묻곤 했다. 선생님….. 저 생물 선택한 학생 아니거든요…ㅜㅜ 그래도 선생님 질문에 답을 못했던 적은 없었다. 대입시험을 2 달쯤 남긴 뒤부터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지구과학은 내가 좋아하던 과목이었다. 성적도 잘 나왔다. 다만… 고3 처음에 배우는 천구좌표계에 적응을 못한 것이 문제였다. 첫 모의고사에서 6 문제를 틀렸는데 모두 천구좌표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구과학을 때려치우고 화학으로 갈아탔다. ^^; 화학은 언제나 쉬웠기 때문이다. (한 달쯤 지나서 당시 틀린 문제를 보니 너무나 쉽더라…. 좌표계에 대한 내 능력이 그 한달 사이 계발됐던 듯하다.)

이들 네 과목을 공부할 때에는 우선 기본적인 공식과 원리를 종이 한 장에 주욱 적고서, 나머지는 그것으로부터 유도하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나서 적은 것만 열심히 외웠다. 이 방법은 늘 적중해서 거의 모든 문제를 쉽게 풀었다. 물리는 고3 때까지 배운 내용을 모두 적어도 A4 용지 한 쪽에 들어갈 정도였고, 화학은 20 여쪽 분량에 불과했다. 물론 생물과 지구과학은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이름과 법칙들 때문에 좀 더 분량이 많았다.

2.5 사회과목

내가 배운 사회과목은 현재의 교과목과는 다르게 사회, 세계사, 지리였다. 대입 때는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사회에는 정치, 경제, 문화를 합한 과목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혼란스러워 했던 부분이 정치 부분이었다. 각종 직책과 임기는 하나하나 100% 따로 외워야 했고, 나는 이것을 외우다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정치를 공부하다가 다른 과목 시험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화야 어떻게 해서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어서 문제될 것이 없었고, 경제는 기본적으로 수요 이론, 인플레이션 이론 같은 것 몇 개만 이해하면 나머지는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물리학이나 화학과 비슷했다. 결국 사회는 시험범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성적이 크게 널뛰었다.

세계사는 매우 얕은 지식을 너무 광범위하게 배우기 때문에 도저히 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과목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일반 상식이 많아진 후에 다시 보니 진짜 쉽더라. -_- 집안이 어려워서 다양한 사회활동을 못하다보니 상식이 부족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개인적으로 결론내렸다.)

지리는 말 그대로 이론의 연속이었다. 그것들은 그때그때 제시되는 자연현상들과 인문적 현상들을 알아두었다가 잘 적용만 시키면 되는 부분이었으며, 덕분에 쉽게 공부할 수 있었다. (물론 지리가 100% 쉬운 과목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한다.)

2.6 종합적 대책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쉽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기억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유연한 사고력을 중시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선입관이 없이 접근해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는 편이다. 종합적 대책을 따지자면 바로 이것이다.

유연한 사고 능력!

3.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나는 기억력이 많이 나빴기 때문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어도 그것을 100% 발휘하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은 별로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부족한 부분을 기억력으로 메워서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직장생활, 학교생활, 사교생활에서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은 한번씩 손해를 보고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그들이 나중에 뛰어나게 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과감히 생각하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간혹 일반인들의 경우를 예상하고 대처하다가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누가 이런 사람을 나무라지 말고, 그들의 뛰어난 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배치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각 구성원끼리 장단점을 솔직하게 공개하고 공유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들이 우선 견제되어야 그 조직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4. 고수가 되어본 사람만이 고수가 될 수 있다.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많은 것을 잘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나하나 꾸준히 관찰하여 극복해 나가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별해서 그것에 최고의 고수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감도 갖고,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일도 없앨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경험은 자신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은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한 분야에 고수가 되면 다른 분야에도 고수가 되는 방법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오목이나 장기 같은 보드게임에서 쉽게 고수가 된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중3 여름방학 때 장기를 친구에게 배웠고, 그 친구를 겨울방학 때 처음… 그리고 그 뒤로는 쭉 이겼다. 고등학교 1 학년 때도 반 친구들과 장기를 많이 뒀다. 하지만 그 친구들 중에는 고수가 없었다. 주변에 장기 좀 두신다는 어른들은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장기는 나와 멀어졌다.
바둑을 공인 1 단까지 배운 십몇 년 뒤에 장기 좀 두신다는 그 어른들과 장기를 둔 적이 있었다. 그동안 장기를 하나도 안 뒀었지만, 예전에 고수처럼 느끼던 어른들을 너무나 쉽게 이길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의 고수가 되고자 할 때에는 첫 발짝으로써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고수가 돼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해 나가면서 점차 큰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락의 글을 더 확장해 읽고 싶으신 분은 “고수가 되어본 사람만이 고수가 될 수 있다“라는 글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ps. 2021.04.16 교정하면서 추가
영어는 해외여행을 자꾸 나가다보니 귀가 트여서 영어를 들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영어단어는 계속 외워지질 않다보니…. 지금도 영어를 전혀 못 한다. ㅜㅜ
국어는 내가 글쓰기를 많이 하다보니, 결국 글쓰기를 잘 하면 쉽게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학교공부가 별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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