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의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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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남부 독일 울름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성장했다. 그의 언어능력이 매우 느리게 성장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아인슈타인은 회고록에 자기가 8 살 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런 정도는 아니었고, 다만 정신적으로 늦게 성장하는 사람이었다고 적어놓았다. 이렇게 늦게 성장하는 상황은 계속되어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른 학생들은 이미 모든 과학적 이론적 체계를 잡고 있었는데 자기는 겨우 이론체계를 하나씩 배워나가는 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엄청난 집중력과 수리능력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과목에서 상위점수를 받았다. 5 학년 때 삼촌에게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소개받고, 스스로 고민해서 증명을 해냈다는 걸 참고하자.

강제징집을 피해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 취리히공과대학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뛰나긴 했지만 수업을 듣는 것을 아주 싫어했고, 사교성이 없었다. 친한 친구의 공책을 도서관에서 보며 홀로 공부하는 시간을 즐겼다.

대신 민코프스키 같은 교수들이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아인슈타인을 안 좋게 봤으며(눈 밖에 났으며), 그래서 석사과정으로 진학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런 아인슈타인이 바람둥이 기질을 갖고 있었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

1887년 미국의 마이켈슨과 몰리가 빛의 속도 측정 실험을 해서 ‘빛의 매질’이라고 믿어졌던 에테르 존재가 부정됐지만 아무도 그것이 뉴턴식 세계관의 종말과 연결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실험을 했던 마이켈슨과 몰리도 그렇게 상상하지 않았다. 이 실험이 에테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만큼…..


1905 년이 되기 전의 물리학계 분위기를 간단히 살펴보자.

1900 년은 두 가지 뜻깊은(?) 일이 물리학계에 일어났다.

첫 번째는 막스 플랑크가 에너지 흐름이 연속되지 않고 끊어진 덩어리로 이루어 졌다는 양자이론을 발표했다. 이 이론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이었던지, 제안자인 막스 플랑크조차 믿지 못했다. 그는 우연히 계산 결과가 실험과 일치할 뿐이며, 곧 진짜 자연법칙이 발견될 것이고, 자기 이론은 진짜 법칙이 발견될 때까지 임시로 사용할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공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사교성이 없었고, 수업에 거의 안 들어가지 않는 등의 이유로 교수들의 눈밖에 난 상태였기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또,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논문인 졸업논문이 발표된 해였다. 빨대에 들어있는 유체에 대한 보잘것 없는 논문이었지만 어쨌든 거대한 물리학자로서의 첫 발을 내딧고 있었다. (보잘것 없다고는 하지만, 유체역학 교과서에 실려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많은 고생 끝에 1903 년 생계를 위해서 스위스 특허국 말단직인 3 급 기술시험사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사회도 독특한 사고방식의 아인슈타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후 논문을 몇 개 더 발표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논문은 모두 1905 년 한 해에 집중된다. 그래서 1905년을 기적의 해아누스 미라빌리스; annus mirabilis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이 1905 년에 발표한 논문은 총 5 편이었는데, 이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1905 년 2 월

첫째 : 포논 이론

독일 물라학회지에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 ; A New Determination of Molecular Dimensions〉을 발표한다. 포논phonon 이론이다. 뒷날 아인슈타인은 취리히공대에서 이 논문으로 물리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논문 내용은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에 관련된 것이다. 비전공자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이 분야의 교과서 같은 중요한 논문이다.

1905 년 5 월

둘째 : 브라운 운동 해석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입자의 (열의 분자운동론에 의한) 운동에 대하여 ; Über die von der molekularkinetischen Theorie der Wärme geforderte Bewegung von in ruhenden Flüssigkeiten suspendierten Teilchen〉는 물 속에 떠 있는 꽃가루 속에 있는 정핵이 불규칙적으로 운동한다 브라운 운동을 설명한 이론이다. 분자의 열운동에 관련된 이 이론으로 지금도 물체의 상태를 공부하기 위해 중고등학생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이론이며, 당시에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원자론을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이론이다.

ps. 우리나라 초기 과학자가 ‘꽃가루가 불규칙하게 운동한다’는 일본책의 오역을 그대로 번역해서 우리 교과서에 실었었다. 최근 교과서가 옳게 수정됐지만, 일반서적에선 계속 같은 오류가 등장하고 있다.(예:『버스트』)

셋째 : 광전효과 해석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 ; Über einen die Erzeugung und Verwandlung des Lichtes betreffenden heuristischen Gesichtspunkt〉는 광전효과를 설명한 이론이다. 앞서 1900년에 발표됐던 막스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바탕으로 빛의 입자성을 도입하여 멋지게 광전효과를 설명하였다. (E=hf 혹은 E=hν 라는 방정식을 말해주면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실듯..^^) 엄격히 양자역학 태동은 막스플랑크의 양자가설보다 이 논문과 보어의 수소원자 모형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넷째 : 특수상대성이론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 ;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는 5월에 발행된 물리학연보에 실렸던 마지막 논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빛이 우주의 절대적 기준이며, 빛을 통해서 봐야만 모든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는 해설을 내놓는다. 이 논문은 관심도 거의 끌지 못했으며, 발행 분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현재 이 논문의 발행본이 남아있지 않다. (당시 물리학연보의 17편에 이 논문이 실렸었지만 이 논문은 이상하게도 모든 물리학연보에서 목차 이외의 부분에서 빠져있다. 이 논문 원본이 발견되길 빈다.) 아무튼 이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지나친 이 논문이 지금의 물리학을 이루는 두 바퀴 중 하나인 상대성이론이다.

이 논문은 발표 몇 년 전에 발표된 민코프스키(취리히 공대 수학과 교수로서 아인쉬타인 스승이었다.)의 연계된 논문도 언급하지 않았을 정도로 참고문헌이 전혀 없어서, 아인슈타인이 상당히 많은 비난을 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특허국에서 일하던 당시 아인슈타인 상황으로 봤을 때는 혼자서 이 결론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ps.
참고로 이 논문에서 광속을 최초로 c로 표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2021 년 추가 : 그런데…. 이런 기호는 모두 맥스웰의 논문에서 계산을 위해 각종 문자를 사용한 것에서 기인한다. 대학교 1 학년 때 배우는 일반물리에서 관행적으로 표기되는 A, B, C, D, E, F, G, H ……… a, b, c, d, e, f …….. 등등의 표기 모두가 맥스웰의 논문에 그대로 쓰인 걸 확인할 수 있다.)

1905 년 8 월

다섯째 : E=mc2

물리학연보에 발표된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 ; Ist die Trägheit eines Körpers von seinem Energieinhalt abhängig>라는 3 쪽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논문이다.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가장 짧은 논문이었을 것이다. 이 논문은 방사성 원소 라듐(Ra)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에너지와 손실된 질량은 비례하고, 비례상수는 빛의 속도를 두 번 곱한 것(c2)만큼의 크기라는 내용이다.

이 논문은 다른 물리학자의 실험결과를 보고, 차원을 통찰하여 얻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은 상대성이론을 밑받침하는 이론이다. 후에 원자폭탄 원리(1940 년 이후의 일~)와 원자력발전 원리(1950 년 이후의 일~)로 사용된다. 별의 에너지원을 설명하고, 핵융합발전 원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여튼..

현대물리학은 이 논문을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인슈타인이 1905 년에 발표한 다섯 편의 논문으로 19세기 말부터 삐걱거리던 뉴턴의 고전역학은 막을 내리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라는 현대물리학의 두 축이 등장한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의 보편적 적용을 위해 10 년동안 연구한 끝에 1915 년 드디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다. 뉴턴의 우주론을 보내고 아인슈타인의 우주 시대를 만들게 된다.

참고1

네 번째 논문이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아니었어도 다른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수 년내에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아니면 지금 – 아직까지 인류가 이 이론을 알아냈을지 확실치 않은 면이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전자기학적 고찰인 특수상대성이론에 중력을 포함시키고, 변화하는 속도를 포함시킨 엄청나게 복잡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스승 민코프스키가 특수상대성이론을 4차원 좌표계를 이용한 수학으로 푸는 것을 보고 자극받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상대성이론이 완벽한 이론은 아니어서 몇 가지 문제점이 알려져 있지만, 현재까지도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상대성이론 이외에도 다른 이론이 존재하지만 다른 이론들은 상대성이론보다도 더 복잡하다. -_-
하여튼….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 사람은 뉴턴-맥스웰-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과학자로 평가받을 것이다.

당시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수성의 근일점 이동 정도를 설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영국 탐험대가 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태양 중력에 의한 빛 경로가 휘어서 별 위치가 바뀐다고 증명한 것은 사실 오차의 한계만큼이나 불확실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 이론의 옳음을 인정해 주었으며, 그래서 물리학은 몇 년 정도는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

참고2

다섯 번째 논문은 방정식으로 E=mc2을 주장한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사고를 거처 이 방정식을 얻게 됐을 것 같다.
에너지의 차원은 [M][L]2[T]-2인데 여기서 질량 차원을 빼면 속도를 두번 곱한 차원이 남는다. 아인슈타인은 라듐 실험 결과에서 에너지와 질량의 비례상수가 매우 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우주의 절대기준인 광속이 그 속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참고로 잊어버리신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부연설명하자면, 차원 분석은 고등학교 때 배우는데, 쉬운 부분이기 때문에 모두 암기하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의 중요성과 활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물리학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소홀히 넘어갔다 해도 가르친 선생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 뿐이니 너무 자책하지는 말자. ^^

참고3

아인슈타인의 위대성은 1905 년 다섯 편의 논문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논문들 한 편 한 편의 가치가 다른 과학자들이 평생 연구한 업적을 감당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성은 그 뒤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엄청난 양질의 논문을 발표했다는데 있다. 예를 하나 들자면, 1917년 아인슈타인은 전자의 원자내 들뜸 현상에 의한 에너지 방출 유도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예견했다. 50여 년 뒤 레이저(Laser)라는 실체가 우연히 발견되어 이 이론이 입증됐다.

참고4

아인슈타인은 후에 양자론을 반대하면서 보어와 심하게 싸워서 보어와 아인슈타인과 동시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 수학자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된다.(옛날 어떤 책에서 본 내용인데, 출처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양자론에 대해 많은 부분 연구를 했고, 이러한 그의 비판이 양자론의 발전이 한층 빨리 진행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본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비판하지 않고 방관만 했다면 양자론은 이제서야 겨우 50여 년 전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며, 20세기 초를 천재의 시대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5

아인슈타인은 1955 년 프린스턴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죽기 하루 전에 그동안 계산하던 것을 모두 끝내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전해지는 아인슈타인이 죽은 뒤에 노트를 보니 계산하던 것이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그는 말년에 자신이 주장해서 (사실 주장은 아니고 다른 과학자들이 진행하고, 자신이 동의한) 원자폭탄의 사용금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이스라엘 대통령직 요구에 자신은 과학자라며 정중히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성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타고난 건망증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많이 고통을 받았을 것 같다.
첫 번째 부인과 세 아들을 낳았고 두 번째 부인과 한 아들을 낳았지만, 결혼 전에 낳은 첫째 아들은 어려서 입양시켰고 나머지 세 아들 중 둘째는 정신병에 걸렸고,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MIT 대학교수가 됐다.

참고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65410
참고 : 『거의 모든 것의 역사』

8 comments on “1905년의 아인슈타인”

  1. 문득 한권의 책을 권해보고 싶네요… “우리가 몰랐던 천재들의 창조성” 홍성욱,이상욱 외 지음 창비 …. 아인쉬타인의 대학교 성적표가 공개됩니다…^^

    1. 음… 글쎄요.. 과연 제가 저 책을 읽게 될런지는 모르겠네요.
      아인슈타인이야 초중고대 모든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요. (물론 언어 쪽 일부만 빼고 말이죠.)

    1. 몇 학년 수준인지 잘 모르겠지만 좋은 독후감 쓰시길 바래요.
      제가 독후감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시기는 중3 정도 때였는데….. 독후감은 맘가는대로 쓰면 된다는 뭐 그런 거였죠.

      하지만, 일단 책을 사서 읽어야 하겠죠. 당연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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