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천재를 보다 #1 – 《호로비츠를 위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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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또는 만들어지는 천재

세상에는 천재가 아주아주 많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천재였지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할 때, 천재는 없다. 또한 천재가 아닌 사람도 없다.
자기가 잘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천재가 되는 것이고, 자기가 잘 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은 보통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여기서 ‘잘하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누구나 어렸을 때 똑똑했거나 뭔가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잘 하는 것이 서서히 또는 급격히 사라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잘 하는 것이 바로 천재를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천재성은 호기심이나 상상력과 연결된다. 아인슈타인은 “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아인슈타인의 말도 문제가 있다. 아인슈타인이 성장하고 생활한 공간이 일반적인 시기와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천재성은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는 것이다. 호기심은 독특한 시선과 끊임없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독특한 시선을 갖는 것은 교육의 영향도 있지만, 그 사람의 기질과 관련되기도 한다. 끊임없는 질문은 답변을 받거나 긍정적은 반응을 받았을 때 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천재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다.

그러면 후천적인 학습과 노력은 어디까지 영향을 줄까? 노력은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2006년 천재를 그리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어느 정도 이상 한계에 봉착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은 흔히 좌절로 이어진다. 노력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보통 “넘사벽”이라고 부르는 한계……. 그것이 없는 사람이 바로 천재일 것이다. 호기심을 갖고 즐기기 때문에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천재도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자기 재능을 못 발견하거나 자기 재능을 알지만 결과를 얻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멘토나 훈련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선현의 노력으로 쌓은 지식을 익히기까지 지도도 필요하다. (드물게는 지도를 거부하는 천재도 있어서 강압적인 교육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일반인이 천재를 지도하는 것은 너무 벅찬 일이다. 인생의 지혜와 지식, 천재성에 대한 경험, 그리고 통찰…. 이런 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천재를 천재로 키울 수 없다. 종잡을 수 없는 창발적 학습능력과 남다른 시각으로부터 천재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 일반인은 그것조차 이해하기 힘들다.

천재가 천재로 크는 것은 결국 본인보다 부모와 사회의 몫이다. 부모와 사회가 다양한 시각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천재는 나올 수 없다. 하나의 목표를 갈구하는 사회, 정직한 결과물을 보여주지 않는 사회, 타인의 시선을 인정해주지 않고 자신의 시선으로 재단하는 사회에선 천재가 크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큰 천재가 있다면 그 천재는 문제일 수 있다.

이명박은 정말 천재일지도 모른다!!

실력있는 학원 강사나 과외 선생은 부모보다 훨씬 더 정확히 아이의 천재성을 발견한다. 그들은 천재였거나 꿈을 향해 전진하다 어떤 한계나 문제를 부여잡고 꿈을 못 이룬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업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에서 문제가 생긴다.


피아니스트를 꿈꿔왔으나 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호로비츠를 위하여》 주인공 엄정화는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면서 말썽꾸러기 경민이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다. 그리고 경민이에게 기초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무렵… 경민이는 혼돈 속에 빠져든다. 피아노를 잘 치면 좋아하는 선생님과 이별할 것이고, 피아노를 안 치면 선생님과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모를 잃었을 때의 아픈 기억까지 더해진다. 혈연이 아닌 지연으로 엮인 관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자아상실 모습이다.

엄정화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경민이를 이용하여 대리만족하려는 욕망과 천재적인 경민이를 가르치기엔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깨달음 사이의 혼란이다. 경민이는 놓아 버리기는 아깝고 잡기엔 벅찬 계륵같은 존재다. 감성은 경민이를 하루라도 더 지도하여 이용하라 부추기고, 이성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라고 신호한다.

결국
경민이를 더 큰 스승에게 양자로 보내는 엄정화.
자신이 경민이 앞길에 지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천재가 아닌 일반인 엄정화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이고, 이 영화를 “영화로 천재를 보다” 시리즈에 첫번째로 다루는 이유다. 영화 중반에 약간 촛점이 흔들린 부분이 있긴 하지만, 소재를 멋지게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천재는 부모 욕심과 사교육 무덤 속에서 범인(凡人)이 되고, 급기야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다수 천재가 외로움과 고통 속 삶을 살아간다.

 사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늘리기 위해 재능이 있다는 말을 남발한다. 이 영화 초반에 이를 지적하기 위한 대사도 나온다.

  “학원하는 친구에게 들으니까요, 3 개월 배울 거 6 개월씩 가르치고 그런데요.
그리고 학원 찾아오는 애들은여, 무조건 소질있다고 그러세요.”

결국 이 영화는 자녀와 학생에 대한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비판하는 영화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집단교육체제의 사교육이 횡행하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옳은 길이 될 지를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에서 천재나 개성있는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천재에 대한 범인의 시각을 참 잘 담아낸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또다른 영화 《아마데우스》나 《굿 윌 헌팅》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ps. 이 글은 사랑하는 조카 원진이와 원탁이를 생각하며 작성됐다.
ps. 비슷한 구성의 1992년 영화 《Little Man Tate》가 있다는 소문이다. ^^


최근 충격적 사건을 겪은 이후 1년 전 초안이 작성됐었던 이 글을 수정하게 되면서 많은 회의를 느낍니다.
그래서 이 글을 끝으로 블로그 운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시리즈물 첫 글이 마지막 글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됐네요. 그동안 제 블로그를 방문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론 블로그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 감사합니다.

11 comments on “영화로 천재를 보다 #1 – 《호로비츠를 위하여》 (2)”

  1. 헉!! 블로그를 접으신다구요???
    아니 대체 왜….;;;;;;;;;;;;;;;;;;;;;;

  2. April Fool’s Day! 하하… 댓글달기 어렵네요ㅎㅎ

  3. 어제가 만우절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
    아니시라면… -.-;

    1. 음… 블로그 옮기거나 닫기 싫습니다.
      블로그를 쉰다고 해도 아마 계속 여기서 운영하게 될 것 같네요.

  4. 핑백: Hy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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